칼 융과 양자역학의 만남: 의식과 현실은 연결되어 있을까?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조금씩 달라지는 건 아닐까?’

사람 기분이 좋을 땐 별것 아닌 일에도 웃음이 나오는데, 마음이 무거울 땐 같은 일이 이상하게도 짜증나거나 불안하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인지 예전부터 저는 “마음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이 단순한 위로 문장이 아니라, 뭔가 진짜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이 주제에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칼 융(Carl Jung)*입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단순히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는 데서 멈추지 않았죠.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어요.
즉, 우리가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커다란 무의식 네트워크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건 단순히 철학적인 상상이라기보단, 실제 인간의 행동이나 꿈, 상징 같은 걸 통해 증거를 찾으려 했던 시도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건, 이 개념이 양자역학과 꽤 닮아 있다는 점이에요.
물리학에서는 ‘관찰자 효과(Observer Effect)’라는 게 있죠.
입자는 관찰되기 전까지 파동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관찰 순간 입자로 확정된다는 원리입니다.
말하자면, 누군가가 바라보는 그 행위 자체가 현실을 ‘결정짓는다’는 뜻이에요.

그럼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결국, 우리의 의식이 현실을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처음엔 이런 얘기가 너무 비과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실 양자 물리학의 세계에선 이런 현상이 실제로 관찰되고 있거든요.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가 입자이자 파동이라면, 그 입자들이 ‘의식’이라는 관찰자의 개입에 반응한다는 건 꽤나 충격적인 이야기죠.
이 지점에서 융의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작용’과,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가 묘하게 겹쳐집니다.

융이 이야기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개념은 *공시성(Synchronicity)*입니다.
이건 말 그대로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뜻해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마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죠.
예를 들어, 며칠 전부터 어떤 사람이 자꾸 떠올랐는데, 갑자기 그 사람에게 연락이 온 적 없나요?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 “우연인가?” 하면서도 어딘가 묘한 느낌이 남아요.
융은 이런 현상을 ‘의미의 연결’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인과관계가 없지만, 심리적이거나 상징적인 차원에서는 서로 긴밀히 얽혀 있다는 거죠.

이걸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보면, *얽힘(Entanglement)*이라는 개념이 비슷합니다.
두 입자가 한 번이라도 상호작용을 하면, 이후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상태 변화가 다른 입자에 즉각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죠.
마치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요.
이걸 단순히 과학의 영역으로만 볼 수도 있지만, 철학적으로 생각하면 인간의 관계나 인연, 심지어 생각의 흐름까지도 비슷하게 작동하는 건 아닐까 싶어요.

물론, 이런 논의들은 여전히 과학보다는 사유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융이 양자역학을 직접 연구한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가 말한 상징과 무의식의 세계는, 현대 물리학이 이야기하는 보이지 않는 ‘확률의 세계’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둘 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현실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원리’를 다루죠.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조금 겸손해집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건 사실 아주 제한된 관찰의 결과일 수도 있으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설명할 수 없는 것들 속에도 나름의 질서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신이든, 의식이든, 혹은 단순한 확률이든 간에 말이에요.

그래서 요즘은 ‘의식이 현실을 만든다’는 말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건 단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가 곧 내 현실을 구성한다는 뜻이에요.

예를 들어, 똑같은 실패라도 어떤 사람은 “역시 난 안 돼”라고 받아들이지만,
다른 사람은 “이 과정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겠구나”라고 해석하잖아요.
결국 두 사람은 같은 사건을 겪었지만, 전혀 다른 현실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건 단순한 심리학을 넘어, 존재 방식의 차이이기도 하죠.

칼 융이 말했던 ‘의식의 확장’이란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요.
자신 안에 있는 무의식의 목소리를 듣고, 그걸 세상과 연결된 어떤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
그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나’를 넘어 ‘우리’라는 더 큰 존재감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같아요.

양자역학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주는 고립된 존재들의 집합이 아니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거대한 하나의 장(場)이라는 거죠.
그 속에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 선택들은 단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미세하게나마 세상 전체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지도요.

물론, 이런 이야기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요.
그냥 가끔은 이런 생각도 괜찮잖아요.
“혹시 지금 내가 하는 이 생각이,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작은 파동처럼 닿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이 조금 다르게 느껴집니다.
조금 더 연결되어 있고, 조금 더 살아있는 것처럼요.

결국 융과 양자역학의 만남은 우리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의식이 현실을 만든다면, 나는 지금 어떤 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아마 답은 각자의 삶 속에 있을 거예요.
그저 우리가 그걸 자각하는 순간,
이미 현실은 조금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니까요.